2008년 07월 04일
라크리모사 - 잘 짜여진 퍼즐 같은 즐거운 작품이었다.

이 책을 읽기 전 작가의 다른 작품인 '뫼신사냥꾼'을 읽었다. 그리고 무척 실망했다. 굴곡이라고는 찾을 수 없고, 감정은 그저 말의 나열에 지나지 않으며, 빠져들어갈만한 매력적인 구석을 일러스트 외에는 찾아볼 수 없는 책이었기 때문이다. 이 감상은 상권을 읽은 시점의 것이고, 하권은 훨씬 낫다고 하는데 딱히 당장 읽을 생각은 없다. 그 정도로 상권이 실망스러웠다.
그래서 '라크리모사'를 읽을 때는 별 기대를 하지 않고 읽었다. 다만 사둔 책 중에 하나였으니까, 그리고 대충 정해둔 순번이 돌아왔으니까 들고 읽었을 뿐이다.
그런데 뒤통수를 망치로 얻어맞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같은 말을 할 수 있었으면 좋았겠다. 하지만 그 정도는 아니고, 그냥 재미있었다. 하지만 그 별거아닌 사실이 얼마나 대단하게 다가오던지!
고백하자면 최근에는 한 스무권 정도 라이트노벨이라고 불리는 책만 읽었다. 그 책들을 읽는데 좀처럼 진도가 나가지 않고, 자꾸 책장을 덮고 다른 일을 하게 되는 이유를 애써 외면해왔는데 이제야 그 이유를 똑바로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그건 그 책들이 재미없었기 때문이다. 평면적이고 오덕스러운 캐릭터, 이름만 한국이고 어디의 어떤 구석이 한국인지 알 수 없는 배경, 코드와 연출만 있고(덤으로 그것도 시시하고.) 기본조차 되어있지 않은 문장. 이쯤 되면 읽어주기 괴로울 수밖에 없다. 일본 라이트노벨을 읽다가 국산 라이트노벨을 읽으면 한층 더 괴로워지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자신만의 스타일이 없으면서, 기본적인 기량조차 함량미달이라면 도대체 어딜 보고 즐겨줘야한단 말인가. 솔직히 현재로서는 오히려 대여점 작품들이 더 낫다는 말까지 서슴지 않겠다. 수적으로 볼때 대여점 작품 중에 '괜찮다' 이상의 작품과, 라이트노벨 중 '괜찮다' 이상의 작품을 비교하면 대여점 쪽의 압도적인 승리다. 물론 나오는 숫자와 그동안 쌓아온 역사가 다르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결과겠지만.
물론 그것은 '라크리모사'와는 별 관계없는 이야기다. 라크리모사는 잘 짜여진 퍼즐 같은 소설이다. 작가가 고심한 만큼 아귀가 잘 맞아떨어져서 하나하나 조각이 맞춰져나가는 듯한 재미를 느낄 수 있다. 하지만 의외성은 부족해서, 예측할 수 없는 재미를 주지는 못한다.(솔직히 중반쯤 읽었을 때 별로 내용을 예상하는데 소질이 없는 나도 전개를 거의 예상했다.) 하지만 나처럼 추리에 소질도 없고 흥미도 없는 사람도 즐겁게 퍼즐조각을 맞춰볼 수 있는 적절한 난이도를 제공했다는 점은 이 소설의 크나큰 장점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막히거나 지루한 곳이 없이 술술 읽히는 데다가, 이런 류의 소설에서 범하기 쉬운 오류 - 작가가 열심히 조사한 자료를 절제없이 정신없이 풀어놓는 우도 범하지 않았다. 딱 필요한 만큼, 그러면서도 흥미를 유발시킬 정도의 자료만이 소설 속에 녹아들어있다. 즉 '라크리모사'는 상업소설로서 갖춰야 할 미덕을 갖추고 있다는 이야기다.
적어도 이 책을 읽는 동안, 나는 오랜만에 끝까지 집중력이 흐트러지는 일 없이 즐거웠다. 그리고 서구권 소설에서 유행하는 스타일을 가져와서, 거기에 노골적으로 판타지적인 요소를 끼워넣어서 만들어졌다는 점이 내 입맛에 아주 잘 맞았다. 악마와의 계약, 그리고 몇 시간 남지 않은 세계의 멸망, 계약으로 얻은 마법의 힘으로 벌이는 초현실적인 행위. 이런 이야기를 유치하게 쓰지 않기란 얼마나 힘든 일일까. 바로 이 부분에서 윤현승은 자신이 베테랑 작가임을 증명했다. 이런 소설에 딱 어울리는 수준으로 세련되게 만들어놓은 것이다. 마지막 결말까지도 아쉽기는 해도 꽤 마음에 드는 것이라서 기분 좋게 미소를 지었다. 아, 그리고 또 한가지. 에필로그에서 보여주는 글자폰트를 이용한 연출이 굉장히 마음에 들었다. 마치 그 문장들이 속삭이듯이 들려오는 느낌이었는데, 작가의 의도가 100% 드러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편집부에서 상당히 잘 처리해냈다는 것만은 틀림없을 듯하다. 앞으로 이런 작품만 나온다면 노블레스 클럽의 미래는 아주 밝다고 하겠으나, 역시 거기까지 바라면 날도둑 심보일 것이고.
그러나 사실 나는 이 작품에 아쉬운 점이 좀 있다.
깊이가 없다던가 감동이 없다던가 하는 말은 집어치우기로 한다. 그것은 물론 진실이지만, 애당초 이 소설은 허들을 거기까지 높여 잡은 작품이 아니기 때문이다. 분명히 이 작품은 여러번 곱씹어볼만한 깊이도 없고, 가슴을 움직이는 감정적인 면도 없지만(부족한 수준이 아니라, 그냥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주 즐거운 소설이니까. 사실 그런건 이런 류의 서구권 소설 베스트셀러들에도 없다.(대표적으로 '다빈치 코드'가 그렇지 않은가.)
첫번째로 아쉬운 점은 이 소설의 배경이다. 한국인인 윤현승은 왜 굳이 이탈리아를 배경으로 '라크리모사'를 쓴 것일까. 이건 국수주의나 민족주의 차원의 이야기가 아니다. 그가 이 소설의 배경을 대한민국으로 선택하지 않고, 등장인물들을 한국인으로 설정하지 않은 시점에서 이 소설은 다른 번역소설과 구분되는 매력을 잃어버렸다. 물론 서구권 사람들이 보면 동양인 작가가 묘사한 자신들의 이야기를 보면서 피식 웃겠지만 그 작가와 같은 나라 사람인 내 입장에서 볼때 이건 그냥 번역서를 읽는 느낌이다. 한국인 작가가 썼다는 느낌이 안 든다는 소리다. 우리나라를 배경으로 같은 이야기를 했더라면 훨씬 더 공감을 얻기 쉽고, 정서적으로도 몰입할 장치를 많이 마련해줄 수 있었을 것이다. 작가가 홈페이지나 블로그 등에서 하는 말을 보면 서구권 작품들에 대한 동경이 짙게 배어있는 느낌을 받는데, 어느정도는 그런 경향이 반영된 결과가 아닐까 싶다.
두번째로 아쉬운 점은 긴박감이 부족하다는 점이다. 이 소설은 당장 세계가 멸망할지도 모르는 판국인데도 불구하고 이상할 정도로 느긋하다. 그만큼 독자도 마음 편하게 볼 수 있긴 하지만, 반대로 말해서 그 이상 몰입할 수는 없다. 당장 세계가 멸망할지도 모르는데 앞이 보이지 않는다는 불안감, 어떻게든 해야 한다는 절박감이 이 작품에는 부족하다. 그리고 누구나 다 다음 순간을 예상하면서도 보고 싶지 않게 만드는, 그러면서도 볼 수 밖에 없는 그런 절망감의 부재가 뼈저리다. 딸을 잃었다는 사실을 안 순간이나, 마지막에 작중에서 내내 떠들어댄 딸에 대해서는 완전히 잊어버린 듯한 루카르도의 태도에서 쯧쯧, 하고 혀를 차게 되어버렸던 것이다. 사실은 그냥 뒤통수를 쳐서 세계가 멸망해버렸더라도 그러려니 했을 것 같은 느낌이다. 조금 더 속도감 있게, 그리고 꽉 조이는 듯한 느낌으로 구성되었다면 좋지 않았을까.
물론 이런 아쉬움에도 불구하고 '라크리모사'는 재미있는 소설이었다. 간만에 행복한 독서를 한 것 같다. '뫼신사냥꾼' 하권에 대한 기대치는 여전히 형편없지만, 윤현승이 다음에 들고 올 이야기를 즐겁게 기대해본다.(근데 '하얀늑대들' 애장본을 동인지로 내느라 올해를 다 보내겠단다. 이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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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y | 2008/07/04 08:27 | 한국장르소설 | 트랙백 | 덧글(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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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작품인가..' 싶었는데, 윤현승 작가분 책이었군요 -_-;;;
사실, 이런 류의 작품에 있어서 가장 기본이 되는 요구는 '재미있다'는 느낌인데,
요즘은 다들 그 이상만을 생각하고 쫓느라,
책을 쓰는 작가도, 책을 읽는 독자도 기본기에는 무관심하다는 느낌이 듭니다.
'더스크 워치'는 읽어보셨는지 모르겠네요.
저는 오히려 '더스크 워치'를 먼저 읽었고, 여기서 작가에 관심이 생겨서
'하얀늑대들'을 읽기 시작했거든요. (읽다가 입대해서 다 읽진 못했지만.. ;ㅁ;)
읽어보셨다면, 어떤 느낌을 받으셨을지 궁금해집니다 @_@
그 외에 작품에 대한 얘기는, 결국 제가 직접 읽어봐야
뭐라 코멘트라도 달 수 있을 듯 합니다...;; OTL
그래도, 저 역시 '그래도 재밌었다'라는 평가를 내릴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드네요.
유치한 소재를 세련되게 표현하는 것..
80~90년대에나 쓰이던 정석들을 요즘 감각에 맞게 표현하는 것..
'먼치킨급' 주인공들을 가지고도 세력의 균형을 맞추고 박진감있게 표현하는 것..
이런데서 작가의 기량이 확실하게 나오는 것 같습니다.
...읽어보질 못해서, '같습니다' 라는 말밖에 못하는게 아쉽네요 ;ㅁ;
대부분의 작품은 지르기도 겁나는 '실험적인' 성격들에,
그나마 수준이 좀 높다는 '대표작'들도,
'이건 정말 최고다. 딱이다' 라고 속시원히 평가를 내릴 수준이 아니라,
'이건 장점이고, 저건 단점이다' 라는 식으로 이성적으로
판단을 내려볼 수준이라는게 참...
그만큼 '열광할만한' 작품은 없는 듯 합니다.
'일본 라노베를 쫓아간다'는 것에서 오는 태생적 한계는 아닐까 싶네요..
차라리 라노베의 느낌만 따오고나서는
'이런게 우리식이다'는 식으로 조금 벗어났으면.. 하는 생각도 듭니다.
(그런 의미에선 차라리 '한국의 소재'를 덕지덕지 가져다 쓰는 '꼬리를 찾아줘!'가
좋아보이긴합니다.. (먼산) 초인동맹도 독자적인 세계관이 눈에 띄긴하지만,
딱히 기존의 궤도를 벗어났다고 보긴 힘드니..)
'월하의 동사무소'가 아닌가 합니다.
한국적 소제를 정말 적절히 이용하다 못해
최근에 동사무소가 동 주민센터로 바뀌는 에피소드까지 들어있을정도...
재미를 이야기하자면 저도 제라르님께 동의합니다. 정말 간만에 미친듯이 집중할 수 있는 책이었지요. 저는 최근 난독증까지 겪는 상황에서 라크리모사를 만나 장장 3시간을 집중하고 앉아있었습니다. 덕분에 약간은 병(?)이 낫는 사태도 발생했지요.
라크리모사는 정말로 잘 짜여진 직쏘 퍼즐을 보는 기분입니다. 한 조각만 접했을 때는 이게 뭔소리? 하며 물음표 띄울 일만 있는데, 그게 여러조각 모이고 전체적인 그림이 보이기 시작하면 의미를 깨닫고 탄성을 지르게 되더라고요.
음-제라르님의 좋은 감상 잘 읽었습니다. 저도 이 감상을 읽으면서 그 때 느꼈던 재미에 대한 느낌이 다시 살아나는 것 같아 좋았습니다.
'왜 배경을 이탈리아로 했을까'에서 아주 많이 공감합니다. 저도 서구권을 조금 동경; 하는 사람 중에 하나라, 이탈리아가 배경이라는 광고에 무척 기대했었지요. 그런데 결과는 무미건조한 외국배경......미국이나 유럽 같이 기후 무난한 어느 나라 하나로 택해도 전혀 무리가 없는 내용이었지요. 적어도 '이탈리아'스러운 소재나 음식(...)이라도 나올 줄 알았는데 말입니다^^;
정말로, 이탈리아가 배경이어야 할 어떤 이유도 찾을 수 없었습니다. 이탈리아 시골에 그런 규모의 도서관이 있다는 것부터 뭔가 억지러운 것 같고, 딸의 설정은 너무 작위적인 캐릭터라는 느낌만 들고... 한국이었으면 한국인 작가만이 쓸 수 있는 느낌이 살아나서 훨씬 좋을 뻔했는데 말이지요.